2014년 영화 BEST10

2014.12.19 18:56

금냥 조회 수:7876 추천:2

2014년 영화 BEST10

 

이 글을 적고 있는 1219일 현재 통합진보당이 헌법재판소의 판결에 의해 해체 되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2, 경주리조트 붕괴로부터 시작된 2014년은 재난의 해였다. 아직까지 세월호는 바다 속에 가라앉아 있고, 땅에선 민주주의의 재난이 계속되고 있다. 현실에서 일어나고 있는 끔찍한 재난들 사이에서 영화는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변호인>에서 송강호가 민주주의에 대한 열변을 토하고, 스펙터클을 보기 위해 1100만 명의 관객이 극장을 찾았을 때, 그것은 역으로 이 나라에 민주주의라는 것이 아직도 판타지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올 해 최고 흥행작인 <명량>의 배경이 되는 울둘목을 배경으로 이순신이 왜구를 수장시킬 때, <명량>을 보고 있던 1700만 명의 관객 중 과연 몇 명이나 그 울둘목에 지금 세월호가 가라 앉아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을까? 세월호는 슬프지만 나는 배가 침몰하는 스펙터클은 보고 싶어 라는 위험한 생각. 그리고 그 생각에 맞춰 문화를 만든다는 기괴한 마케팅을 펼치는 CJ. 괴벨스의 유명한 어록. ‘선동은 문장 한 줄로도 가능하지만 그것을 반박하려면 수 십장의 문서와 증거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것을 반박하려고 할 때면 사람들은 이미 선동당해 있다.’ 나는 영화가 비록 예술이 아니고 일개 산업이라고 생각하지만 적어도 그 상품을 제공하는 사람들이 영화라는 상품에 대한 위험성과 안전성에 대해서 심사숙고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지금 한국의 상업 영화 중에서 과연 어떤 상품이 그런 위험성과 안전성을 고려한단 말인가? 올 해의 영화 리스트를 뽑으며 단 한 편의 한국 영화도 포함시키지 못했던 것은 한국 영화가 점점 비겁해지고 야비해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마치 안전벨트 없는 자동차를 타고, 손잡이 없는 주전자를 팔면서 이것을 사야 애국이고 이것을 사야 당신 가족을 먹여 살릴 수 있다는 선동. 그 선동을 반박하기 위해서 나는 열 편의 영화를 꼽았다. 그리고 이 열 편은 세상엔 아직도 진실 되고, 솔직하며, 정정당당하고 비겁하지 않은 영화가 만들어 지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 준다. 그래서 이 영화들은 나에게, 그리고 이 글을 읽는 여러분들에게 영화라는 매체의 미래는 여전히 열려 있다는 것을 일깨워 줄 것이다.

 

이 목록은 20131220일부터 20141219일까지 개봉한 영화들로 선정했고, 한국 영화와 외국 영화를 따로 구분하지는 않았다. 아쉽게 이 열 편의 리스트에 올리진 못했으나 좋았던 영화들은 다음과 같다. 지아장커의 <천주정>, 자비에 돌란의 <마미>, 박경근의 <철의 꿈>, 제임스 군의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노아 바움백의 <프란시스 하>. 추가로, 2013년에 개봉했으나 관람은 2014년에 한 장률의 <풍경>을 이 목록에 넣을 수 있었다면 꼭 넣었을 것이라는 언급을 하고 싶다.



인사이드 르윈.jpeg


내게 2014년 최고의 영화는 조엘 코엔의 <인사이드 르윈>이다. 코엔 영화의 가장 큰 특징을 두 가지만 뽑아보라고 한다면 하나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상황극이라는 점일 것이고, 다른 하나는 괴짜 같은 캐릭터일 것이다. <인사이드 르윈>은 그 점에서 명백한 코엔 형제의 영화인데, 이 영화가 다른 코엔 형제의 영화들보다 특별한 것은 그들이 만든 이 르윈 데이비스라는 캐릭터에 깊은 연민이 묻어 있기 때문이다. 포크 송의 시대인 1960년에 우후죽순처럼 등장한 포크 가수 중에 한 명인 르윈 데이비스의 일대기를 따라가는 이 영화는 마치 오디세우스의 여정처럼 르윈 데이비스의 여정을 쫓아간다.(르윈과 함께 그 여정에 동참하는 고양이의 이름은 오디세우스의 또 다른 이름인 율리시즈다.) <인사이드 르윈>이 사려 깊은 영화인 것은, 그들이 만든 르윈 데이비스라는 찌질하고 고집 쌘 캐릭터에 대해 코엔 형제는 쉽사리 판단하거나 훈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특히나) 근래 한국 상업 영화에선 자신들이 만든 캐릭터를 시나리오의 필요에 의해 쉽게 쓰고 무책임하게 버리는 경우가 흔하다. 그것이 일종의 시나리오의 경제성이라고 생각하면서 자신이 만든 캐릭터를 단순히 영화적 기능으로 사용해 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인사이드 르윈>에서 코엔 형제는 영화가 시작되기 전에 이미 사건을 벌여 놓고, 그 사건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이상하고 침울한 공기를 전달한다. 다시 말해, <인사이드 르윈>은 사건의 영화가 아니라 무드의 영화인 것이다. 캐릭터가 중요한 <인사이드 르윈>에서 그 캐릭터가 겪는 사건보다 캐릭터를 감싸고 있는 무드를 중요하게 표현한 것은 사건보다 그 사건을 둘러싼 세상과 거기서 오고가는 감정들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시작과 끝이 똑같은 원형적 구조를 취하고 있는 이 영화는 결국 제자리로 돌아올 수 없는 운명에 대한 깊은 페이소스를 품고 있다. <인사이드 르윈>은 관객을 판단하거나 설득시키는 영화가 아니다. <인사이드 르윈>은 르윈이 살고 있는 세상과 르윈의 감정에 대한 영화다. 그것은 자신이 만든 캐릭터를 믿고, 그 캐릭터가 영화 안의 혹독한 세상에서 버티고 살 길 바라는 영화감독의 소박하지만 위대한 결단이다.



언더 더 스킨.jpg


두 번째 영화는 조나단 글레이저의 <언더 더 스킨>이다. 제임스 카메론이 <아바타>를 만든 이후부터 갑자기 디지털 영화의 시대에서 체험의 영화로의 시대로 트랜드가 바뀌었다. 이제 극장들은 3D를 넘어 4D를 설치하면서 온 몸으로 영화를 경험하도록 하고 있다. 마치 예전에 놀이공원에서나 경험해 볼 법한 풍경이 극장으로 들어왔다. 하지만 나는 그런 인공적인체험이 마치 자위를 하는 기구를 가져다 놓고 영화를 보며 자위를 하는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비싼 돈 주고 3D4D를 보러 왔으니 그에 걸맞은 흥분되는 체험을 시켜줘! 라는 것 같은 이상한 기분을 떨칠 수 없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언더 더 스킨>은 우리에게 잊고 있던 영화의 감각을 느끼게 해준다. 영화를 구분하는 방법은 수도 없이 많지만, 영화사의 초기부터 구분되어져 온 방법 중에 하나는 영화를 육체의 영화와 정신의 영화로 나누는 것이다. 간단히 정의 내리자면 장 르누아르는 육체의 영화를, 알프레드 히치콕은 정신의 영화를 만들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현대 영화에서 점점 육체의 영화의 수는 줄어들고 있다. 디지털화 된 세계에서 아날로그적인 육체에 대한 매혹은 아무래도 흥미를 끌기 힘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나단 글레이저는 SF라는 지극히 정신적인 장르 안에서 육체의 감각을 일깨우는 영화를 만들었다. 설명되어지지 않는 내러티브가 주는 미스테리함과 불안감이 마치 공포 영화를 보는 것처럼 영화를 지배하고 있는 이 영화는, 이야기를 친절히 설명하면서 머리로 이 영화를 이해하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야기를 애매모호하게 만드는 대신, 숏의 선택, 편집의 리듬, 사운드의 기괴한 사용 등으로 우리로 하여금 이 이야기의 공허함과 무기력함을 몸으로 체험하도록 만든다. 그러면서 이미 디지털화 된 영화의 세계에도 여전히 육체의 영화가 우리를 일깨워준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언더 더 스킨>은 인공적인 체험의 영화의 시대에 도래한 진정한 육체의 영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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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해의 세 번째 영화는 리차드 링클레이터의 <보이후드>이다. ‘영화 매체 힘은 매체의 결함이 있기에 가능하다라는 루돌프 아른하임의 말이 있다. 아마도 여기서의 결함은 제작상의 여러 현실적인 문제들을 포함할 것이고, 또한 러닝타임이라는 절대적인 한계 역시 포함할 것이다. 영화에서 어쩔 수 없이 제약된 채 흘러가는 그 시간을 하나의 영화적 방법론으로 택한 <보이후드>는 그 시간이 축적될 때의 그 견고함에서 나오는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영화다. 사실 <보이후드>가 택한 (한 대상을 수 십년 간 찍는다 라는)영화적 방법론 자체가 새로운 것은 아니다. 마이클 앱티드가 만든 다큐멘터리 <>도 있고, 마이클 윈터버텀이 만든 <에브리데이>도 비슷한 방법으로 만든 영화다. 그래서 단순히 이 영화를 12년 간 만들었다는 것을 상찬으로 하기엔 이미 그 전례가 있는 셈이다. 하지만 <보이후드>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흥미로운 영화인 것은 영화의 감독이 바로 리차드 링클레이터이기 때문이다. 데뷔작 <슬래커>부터 줄곧 픽션과 논픽션의 경계를 가로 지르며 영화에서의 인공적 리얼리티에 대한 관심을 표했던 링클레이터의 영화 미학은 <보이후드>에서도 이어진다. 링클레이터는 픽션과 논픽션의 경계를 허물어 우리에게 캐릭터의 삶을 좀 더 보편적이고 우리가 수긍할 수 있는 현실의 영역으로 가져다준다. 그것이 연애든(<비포> 시리즈), 살인이든(<버니>) 말이다. 대신 <보이후드>에선 그 캐릭터의 삶의 한 측면을 찍은 것이 아니라, 그 캐릭터의 삶 자체를 찍은 것이다. 그래서 영화의 시퀀스는 나이테가 되고, 쇼트는 줄기가 되어 하나의 거대한 나무를 형성하며, 그렇게 자라는 나무를 보는 것만으로도 이 영화는 우리에게 영화를 보는 행복을 느끼게 한다. 세상엔 연출력이 뛰어난 걸작도 많고, 삶을 통찰하게 만드는 걸작도 많고, 압도적인 재미로 관객을 매혹시키는 걸작도 많다. 하지만 영화를 본다는 행위가 행복한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는 영화는 정말 드물다. <보이후드>는 영화를 보는 행위의 행복을 느끼게 해주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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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번째 영화는 사라 폴리의 <우리가 들려줄 이야기>이다. 많은 사람들이 2014년의 영화로 <보이후드>를 꼽지만, 나는 <보이후드>와 함께 이 영화도 같이 언급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들려줄 이야기><보이후드>와는 다소 다른 방법으로 비슷한 테마를 얘기하고 있다. 두 영화 모두 가족의 성장과 흥망성쇄라는 테마를 가지고 있지만, <보이후드>가 나무를 잘라 그 단면을 통해 나무를 생각해 보는 영화라면 <우리가 들려줄 이야기>는 그 나무에서 뻗어나간 가지를 통해 그 나무를 생각해보는 영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쉽게 말하자면 <보이후드>는 미시적인 영화라면, <우리가 들려줄 이야기>는 거시적인 영화다. 그래서 똑같은 가족에 대한 얘기를 하고 있지만 두 영화는 확연히 다르다. <우리가 들려줄 이야기>는 카메라 앞에 선 인터뷰 대상들의 진솔함과 위트, 그리고 그걸 표현해내는 다양한 푸티지 영상들의 힘을 통해 거창한 이야기가 아닌, 소박한 이야기로도 우리를 이 영화에 빠져들게 만든다. 증언을 토대로 기억을 재구성하는 다큐멘터리는 사실 본인이 애초에 구상했던 테마에서 벗어날 위험이 있다. 기억이란 사람들마다 우선적으로 떠올리는 순서가 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라 폴리는 그것을 역으로 이용해 자신을 중심으로 한 이야기에 증언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마치 실타래처럼 엮으면서 개인에 대한 배려가 곧 가족에 대한 배려이며, 그것이 가족을 둘러싼 세계에 대한 배려임을 보여준다. 그래서 <우리가 들려줄 이야기>는 우리에게 대화에 귀를 기울이고, 상대방을 배려하는 방법을 가르쳐준다. 그것이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예절이라고 해도 그것을 보여주는 영화는 흔치 않다. <우리가 들려줄 이야기>는 우리를 교육시키는 영화다.



메콩호텔.jpg


다섯 번째 영화는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의 <메콩 호텔>이다. 사실 나는 이 영화는 2012년 부산국제영화제 때 본 이후로 보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2년 전에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의 충격을 잊을 수 없다. 거의 내러티브가 없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끝없이 이어지는 데드 타임들의 반복. 시간의 흐름마저 잊은 듯한 메콩 강의 압도적인 풍광에 대한 매혹. 하지만 <메콩 호텔>은 이 영화 단 한 편만으로는 그 가치를 느끼기 힘들다. 아핏차퐁의 영화는 복제와 전이의 연속이다. <열대병>에 등장한 장면이 <징후와 세기>에 등장하고, <친애하는 당신><엉클 분미>는 기묘하게 겹친다. 마치 필모그래피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만델브로 집합처럼 보이는 아핏차퐁의 영화 세계는 <메콩 호텔>에서도 이어진다. 아핏차퐁이 <메콩 호텔>을 만들기 바로 전에 만든 두 편의 단편 영화인 <잿가루><사크다><메콩 호텔>의 중요한 테마인 음악과 죽음과 이어지는 가운데, <메콩 호텔>은 원래 <엑스터시 가든>이라는 영화의 리허설을 촬영한 영화이다. 계속해서 자가 확장을 해가는 아핏차퐁의 영화 세계는 겉만 봐선 어려워 보이지만 한 없이 단순하다. 아핏차퐁은 끊임없이 영화에서의 영혼을 건드리며,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끔 하는 영화의 속성을 그대로 내러티브에도 적용한다. 그래서 그는 보이지 않는 음악을 보이게끔 하며(<메콩호텔>), 보이지 않는 유령을 보이게끔 하며(<엉클 분미>), 보이지 않는 영혼을 보이게끔 한다(<열대병>). 그래서 그의 영화는 우리로 하여금 이미지의 문제를 제기하게 만든다. 보이지 않는 것을 어떻게 믿게끔 할 것인가가 아핏차퐁 영화를 관통하는 테마 중에 하나인 것이다. 그 때 아핏차퐁은 그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만들면서 우리에게 세상을 떠도는 수많은 환영들을 믿게끔 만든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좀 더 풍요로운 세계를 만들게 한다. 세상에 영혼이 없다면 얼마나 쓸쓸한 것이겠는가?



나를 찾아줘.jpg


여섯 번째 영화는 데이빗 핀처의 <나를 찾아줘>이다. 핀처는 <패닉 룸> 이후로 끊임없이 감시와 다중 시점에 대한 영화를 만들었다. 그래서 명백해 보이는 어떤 사건에 대해 그 명백함을 진실로 확신할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을 던졌다. 그래서 핀처는 어쩌면 네오 리얼리즘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세계에 도래한 진실에 대한 의문을 제시한 영화를 만들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하게 되었다. 그러나 핀처의 근작들은 물론 훌륭했지만 압도적이거나 새롭지는 않았다. 핀처의 영화는 무언가 모르게 같은 자리를 돌고 있다는 느낌을 받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 핀처가 만든 <나를 찾아줘>는 걸작이다. 핀처는 이전 영화에는 사용하지 않았던 미디어를 등장시키면서 우리에게 명징한 이미지들의 왜곡을 노골적으로 제시하는데, 그러면서 이제 그 이미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게 되는 주체는 영화 속 주인공들 뿐만 아니라 관객들로까지 확장된다. 다시 말해 <나를 찾아줘>는 우리에게 영화를 보는 자리를 질문한다. 우리가 만약 영화 속의 상황이라면 우리는 닉을 살인범으로 생각할 것인가? 우리는 에이미를 정말 그녀의 이미지처럼 불쌍한 피해자라고 생각할 것인가? 관객의 자리를 논하지 않는 일반적인 헐리우드 영화에서 <나를 찾아줘>는 예외적인 영화다. 핀처는 거의 완벽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의 영화적 테크닉으로 관객을 붙잡는다. 그리곤 오프닝과 엔딩의 동일한 두 쇼트에서 우리는 아무런 반전과 효과 없이도 영화적 강력함을 느끼게 된다. 그것은 바로 에이미가 바라보고 있는 자리가 관객을 향해 있기 때문이다.


 

동경가족.JPG


일곱 번째 영화는 야마다 요지의 <동경가족>이다. 오즈 야스지로의 <동경 이야기>를 리메이크한 이 영화는 좋은 영화란 무엇인가를 알려준다. 그것은 아주 단순하다. 기본적으로 좋은 영화는 나쁜 장면이 없는 영화라는 것이다. 물론 영화사에 남을 걸작을 리메이크한 영화가 나쁜 장면이 있을 리는 만무하다. 하지만 이 영화는 속도와 기술에 취해 있는 현대 영화에서, 그런 속도와 기술에 일체 관심을 두지 않고 자기가 만드는 영화에 대한 존경심과 그 영화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는다. 또한, <동경가족>은 좋은 사람에 대해 당신은 좋은 사람이라고 말하는 영화다. 그것은 오즈 영화의 핵심이기도 하다. 좋은 사람에 대해 찍는 것. 우리 시대의 영화들은 한 악당들이 멋있다고 말하고, ‘간지 나는선인들이 자신의 선함을 뽐내고, 되도 않는 무정부주의적 캐릭터들이 활개를 치고 있다. 하지만 우리 삶의 근간은 좋은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동일본 대지진 이후 일본에게 던져진 과제이다. 함께 살아가는 것. 야마다 요지의 <동경가족>은 우리에게 잊고 있던 그 근간을 다시금 일깨워 준다. 마치 에드워드 양이 오즈적으로 만든 <하나 그리고 둘>에서 주인공에게 동료가 당신은 좋은 사람입니다라고 말했던 것처럼, 야마다 요지 역시 오즈 영화의 테마를 잊지 않는다. 하지만 이 영화는 더할 나위 없이 나루세 미키오적인 영화다. 야마다 요지는 마치 나루세가 영화에서 캐릭터간의 감정을 다루듯 섬세하고 세심하게 인물을 보듬는다. 그리고 그 사려 깊음이 영화 전체에 묻어난다. 올 해 본 가장 슬픈 영화.



그랜드부다페스트호텔.jpg


여덟 번째 영화는 웨스 앤더슨의 <그랜드 부다페스트호텔>이다. 내게 이 영화의 핵심은 이 모든 캐릭터들이 죽은 자들이라는 것이다. 영화의 시작은 이 이야기를 쓴 소설가의 동상 앞에 한 소녀가 서 있는 장면이다. 다시 말해, 이 영화에 등장하는 (소녀를 제외한) 모든 캐릭터는 모두 죽은 인물들이며 과거의 인물들이다. 하지만 감독은 자신이 하는 이야기를 믿어야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웨스 앤더슨은 자신이 만든 수많은 캐릭터들을 마치 캐리커쳐처럼 다루면서 그들에게 리얼리티에 의존하지 않는 판타지를 제공한다. 그것은 죽은 자들을 위해 부르는 웨스 앤더슨의 환상적인 소네트이다. 웨스 앤더슨은 시대를 회상하지도, 인물을 추모하지도 않지만 그들을 마치 지금 당장 튀어나올 것처럼 화려한 색과 뚜렷한 미장센으로 표현하면서 캐릭터에게 생명을 만든다. 캐릭터에게 생명을 준다는 것처럼 어려운 일은 없다. 왜냐면 캐릭터는 당연히 영화 속에서만 기능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웨스 앤더슨은 그것에 성공했다. 하지만 영화의 거의 마지막 쇼트들에서 웨스 앤더슨은 결국 현실의 쓸쓸함으로 되돌아온다. 그는 판타지를 보여주면서 자신이 발 딛고 있는 현실을 잊지 않는다. 그래서 웨스 앤더슨은 미셸 공드리와 다르고 팀 버튼과 다르고 장 피에르 주네와도 다르다. 그는 환상적인 미장센과 수많은 캐릭터들을 직조하지만 결코 현실을 외면하는 판타지를 선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웨스 앤더슨은 여전히 <그랜드 부다페스트호텔>보다 더 좋은 영화를 만들 것이라는 기대를 갖게 만든다.



울프 오브 월 스트리트.jpg

 

아홉 번째 영화는 마틴 스콜세지의 <더 울프 오브 월 스트리트>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이 영화는 스콜세지가 2000년대에 만든 영화중에 최고 걸작이다. 개인적으로 스콜세지가 90년대 만들었던 영화들에 비해 2000년대 작품들은 그 힘이 많이 떨어져 있다고 생각했다. 90년대 실패작 중 하나라고 말하는 <케이프피어> 조차도 <디파티드>에 비하면 더 흥미로울 정도였다. 하지만 올 해 개봉한 <더 울프 오브 월 스트리트>는 테크닉이 뛰어난 감독은 언제라도 좋은 영화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만들었다. 이 영화에서 스콜세지는 자본가를 마치 갱스터 영화의 주인공들처럼 묘사한다. 초기에 스콜세지 영화들의 갱스터들은 거리에서 하릴없는 청년들이었고, 후엔 사업에 손을 댔다. 그리고 이제 <더 울프 오브 월 스트리트>에선 아예 자본가가 되어 활개를 친다. 자본가가 마치 갱스터처럼 마약을 하고, 돈을 구슬리고, 환락을 일삼는 모습을 스콜세지는 거의 회춘한 듯이 현란한 테크닉으로 보여준다. 스콜세지 영화의 탁월함은 우리에게 범죄의 세계에 충분히 매혹되도록 만든 다음 그 왕 같던 인물이 비굴하게 몰락해가는 과정을 보여주며 관객에게 그 세계의 참혹함을 느끼게 해준다는 것인데, <더 울프 오브 월 스트리트>는 그런 점에서 스콜세지의 완벽한 회귀이다. 이 영화는 <카지노> 이후 스콜세지 최고의 걸작일 것이다.



클라우즈 오브 실즈 마리아.jpg


마지막 영화는 이 리스트를 작성하기 위해 마지막으로 본 올리비에 아샤아스의 <클라우즈 오브 실즈 마리아>이다. 이 영화를 설명하기 위해선 단 한 마디의 어록만이 필요한 것 같다. 그것은 바로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의 말이다. ‘무용수와 무용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는가?’ 이 영화는 배우와 연기, 연기와 연극, 연극과 영화, 영화와 현실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우리에게 진실과 허구에 대한 미묘한 경계를 체험하게 만든다. 훌륭하게 조율된 연기 안에서(특히 크리스틴 스튜어트!) 우리는 진정한 예술가와 예술을 구분하는 것의 무의미함을 이 영화를 통해 느낄 수 있다. 하지만 한 편 그것은 구름과 스캔들처럼 떠들썩하지만 덧없는 것이기도 하다. <클라우즈 오브 실즈 마리아>는 여타 다른 좋은 영화들처럼 우리에게 무언가를 강요하지 않고 그 영화가 가진 미학적 방법으로 우리에게 이야기를 걸면서, 덧없고 변화하는 우리의 삶을 돌아보게 만든다. 그래서 이 영화는 진실 되고 정정당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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