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트>, 2014
연출 부지영
출연 염정아(선희), 문정희(혜미), 김영애(순례여사)
지금, 바로 '태도'의 문제
태영(도경수 분)은 밀린 임금을 편의점 사장에게 왜 주지 않느냐며 따져 묻는다.
하지만 사장은 일하기로 약속한 두 달을 못 채웠기 때문에 줄 수 없다고 한다.
억지로 떠밀려 편의점을 나선 순간, 같이 갔던 수경(지우 분)은 느닷없이 돌을 집어 던진다.
박살나는 편의점 유리문. 이어 화가 난 사장은 득달같이 쫓아 나와 태영의 멱살을 잡고 뺨을 후려친다.
이 모습을 바로 옆에서 수경은 지켜본다. 그저 겁먹은 얼굴을 한 채 입을 다물고 있다.
그리고 태영은 아무런 항변도 하지 않고 뺨을 내준 채 그저 힘없이 맞기만 한다. 사소한, 하지만 나에게 이상한 장면.
왜 수경은 자신의 짓이라고 편의점 사장에게 말을 하지 않는 것일까?
사정없이 내리치는 그래서 태영의 짓눌려 부어오르는 뺨과 사장의 손아귀가 말하는 명백하고 부당한 폭력에 겁을 먹은 것일까?
또 태영은 자신이 한 짓이 아님에도 사장에게 일방적으로 뺨을 맞는 것이 방금 전 수경의 돌발적 행위를 옹호하면서 그녀를 보호하기 위한,
혹은, 아니 심지어 자신도 수경처럼 '욱'하는 마음에 그렇게 했을 수도 있었다는,
지레 앞선 스스로의 죄의식을 반성이라도 하는 것일까?
이전 장면을 복기해 본 수경의 당차고 나름 똘똘한 행동, 그리고 태영을 대하는 태도로 미루어 짐작한다면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 장면들이다.
오히려 그녀가 태영의 위치라면 더 강단지게, 매섭게 사장의 행동에 맞설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무지막지한 폭력에 쉽게, 어쩌면 단순할 정도로 고개 숙이는 수경의 모습은 예측 가능한 그림은 아니다.
그렇다면 부지영은 왜 이런 억울하게 매 맞는 태영과 이를 아무 말 없이 지켜보는 수경의 모습으로 교차편집을 몽타주했을까, 하는 것이다.
여기서 부지영과 다른 관점, 하지만 동일한 의미에서 편집을 해보자.
편의점 사장에게 쫓겨 나오고 이어 손만 등장하고 돌이 들려진다.
그리고 던져진 돌에 의해 편의점 유리문이 박살난다.
깨진 유리문을 바라보는 태영과 수경의 바스트샷. 쫓아 나온 편의점 사장은 태영의 멱살을 잡고 뺨을 후려친다.
태영으로 촉발된 원인과 편의점 사장에게 부당하게 뺨을 맞는다, 라는 행위의 결과가 담긴 이 시퀀스.
이 별도의 카메라적 시선,
앞서 부지영의 카메라와 행위에 있어서는 결과론적으로 같은 의미를 발생시킨다.
나의 태도의 정당함을 우리가 사는 지금의 사회는 부당한 행위로 드러낸다는, 모순의 씁쓸함으로 상징화된 장면인 것이다.
하지만 부지영의 카메라가 선택하고 그려낸 ‘수경의 돌발적 행위’,
그렇기 때문에 바로 여기서 부지영이 말하는 <카트>의 또 다른 의미가 발생하고 있다.
부지영은 나에게 벌어진, 혹은 내 주위에 벌어진 ‘어떤 현상’에 대한 태도의 ‘무지ignorance’를 우회적이면서 냉소적인 씁쓸함으로 은유하고
있는 것이다.
누군가 묻는다.
지금 살기 위해 들이키는 공기가 보이느냐고.
하지만 공기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저 공기를 들이쉬고 내쉬는 행위의 반복이 공기의 존재를 표방할 뿐이다.
살기 위해 내 육체에 달린 코를 통한 들숨과 날숨의 행위, 이것는 우리에게 의도적인 인식으로 각인된 행동도, 행위도 아니다.
그저 습관화된, 당연한 행동으로 치부된 체득의 일부분일 뿐이다.
다만, 아주 급박한 순간,
예를 들어 물에 빠져 당장이라도 죽을 절체절명의 순간, 물 밖으로 빠져 나올 때,
그래서 살기 위해 한껏 들이키는 숨이 나의 입과 콧구멍, 기도를 지나 폐와 심장, 세포 곳곳을 통해 우리는 내 몸 안으로 흡입되는
공기의 모습을 보게 된다.
아니, 느끼게 된다.
다시 말해 이때의 행위는 체득되어 자동화된 행동이 아니라 인지되어 스스로 자신에게 인식된 살고자 하는 의지로서의 수동적인,
나만의 행위가 된다.
비로소 의식함으로 해서 보이지 않던 행동과 나의 행위, 곧 ‘무지’를 깨는 것이다.
부지영의 카메라에 담긴 수경의 ‘돌발’적 행위는, 그러니까 태영의 시각에서는 혁명과도 같은 행위일 수 있다.
하지만 수경의 성격으로 견주어 단순한 ‘돌발적’인 것으로만 머무른다.
부당함에 맞선 당당함일 수 있겠으나, 정당한 행위는 아닌, ‘무지’에 가까운, 부지불식간의 행위가 된다.
그렇기 때문에 수경이 돌을 던져 편의점 유리문이 박살내는 것이 자신의 행위였음에도 떳떳이 말을 할 수 없는 것은
태영이 뺨을 맞는 순간, 이 사실을 그녀가 알게 되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서서 보이는 것이 있다.
앉아서 보이는 것도 있다.
그리고 엎드려야 보이는 것도 있다.
이 말들의 의미는 세상의 관점이 어느 위치에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또는 동일한 시각과 관점이 없다는 말일 수도 있다.
하지만 또 다른 의미에서는 보이지 않는 세상을 보려고 한다면 어떤 자세와 행동, 행위를 내가, 우리가 해야만 하는지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부지영의 <카트>는 바로 이 주위의 ‘어떤’ 환경에 소극적으로 대처하는, 우리의 ‘무지몽매함’을 고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수경은 방금 전까지 편의점 사장에게 그 친구의 억울함과 그에 대한 부당한 처사를 내 것처럼 항변했으면서도,
정작 자신이 좋아하는 그 친구가, 자신의 ‘돌발’행동으로 인해 도리어 엉뚱하게 잘못에 대한 대가로 인정사정없이 뺨을 맞는데도,
수경은 ‘내가 했다’고 당당히 말을 하지 못한다.
이 모순적인 태도, 어쩌면 우리 모두의 몸짓일 수도 있다고 부지영은, <카트>는 돌려 말하고 있는지 모른다.
자본의 논리에 따라 나눠진 '뭉뚱그려진' 공정한 처사라는 미명의 논리와 계약이라는 ‘페이퍼’ 아래 보이지 않는 세상의 모습을
부지영은 <카트>의 비정규직 노동자가 당하는 부당함으로 일변하여 말한다.
더 나아가 바로 이 부당함의 세상이 바로 옆에 있는 사실,
바로 그것을 알아채지 못하거나 알아채더라도 등 돌리고 고개 숙이는 방관과 ‘무지’일거라고 매 맞는 태영과 입 다문 수경의 모습을 통해
냉소적으로 비약하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흔히, 혹은 자주 다른 누군가에게 ‘난 너를 이해해’, 또는 ‘너는 나를 정말 이해할 수 있니?’는 말을 한다.
누군가를 이해하고 그리고 어떤 사실과 진리를 이해한다는 것,
곧 ‘이해’라는 것은 온전히 그 사실과 진실을 ‘안다’, ‘알고 있다’, ‘알게 된다’는 것을 전제로 비로소 내가 너를 통해 이치를 깨닫게 되는 것,
다시 말하면 내가 ‘어떤’ 사실의 본의를 진정으로 깨닫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이해의 단계에 들어서기 전해야 할 행위,
바로 그것은 사실과 진실을 제대로 보고 그래서 ‘안다’, ‘알 수 있다’, ‘알게 됐다’는 것,
곧 '앎konw(ledge)'이라는 행위가 미리 수반되어야만 한다.
<카트>가 그리는 세상을 이해하기 위한 첫 번째, 먼저 지금의 나의 태도와 행위는 지금, 현재 어떤 자세를 취하고 있는가,
그리고 이것을 수반으로 해서 보이지 않던 세상, 혹은 보려 하지 않았던 세상의 모습을 똑바로 직시하는 것,
바로 이것이 똑바로 알고 올곧은 ‘이해’로 다가가는 것이 아닌가 한다.
새삼스레 부지영의 <카트>는 우리가 모르는, 혹은 감춰진 ‘어떤’ 세상의 일을 고발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옆에 있어도, 지금 벌어지고 있는 그 '어떤' 현상, 그 사실과 진실을 보지 못해 벌어진 그 부당함의 원인제공,
곧 우리의 태도를 문제시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사족_
익뮤 <카트> 시사회날,
8시 15분이 되기 전에 입장했는데도 이미 상영중,
'오잉, 뭐지?'라는 멘붕도 잠시, '딴지'를 건 용자의 건의로 재상영.
그 과정에서 앞서 보았지만, 어느 새 사라진 등장인물의 이야기가 담긴 두 장면,
선희와 혜미, 최과장이 나누는 '까대기'를 도와달라는 대화 / 미진과 친구, 그 친구의 엄마가 나누는 대화이다.
시간 단축을 위해 극장 측이 자른 것인지, 아니면 이후로 극장에서 상영될 판본인지, 사라진 두 장면.
하지만 이 두 장면은 등장인물에 대한 구체적인 성격을 드러내는 무시못할 부분이기도 하다.
시사회의 재상영을 하면서 에비뉴엘이 저지른 '사소한' 실수였기를 바랄 뿐이다.
스타니~^^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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