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피 : 그러지 말았어야지
닐 블룸캠프의 신작 채피를 익무 시사로 보고 왔습니다.
찬양하라 익스트림 무비.
짧게 가겠습니다.
1. 디스트릭트 9의 굉장한 성취와 엘리시움의 갸우뚱 이후 우리는 닐 블룸캠프 감독에 대해 평가하기를
유보합니다. 뭐야 잘 하는 애야 못 하는 애야. 적어도 지표가 1:1인 상황에서 우리는 이번 영화 채피가
그에 대한 평가에 큰 영향을 끼칠 것이란 걸 잘 알고 있는 상태죠. 어떤 쪽으로든 평가는 기울게 되었습니다.
2. 채피는 미묘합니다. 좋은 구석과 나쁜 구석이 섞여있죠. 한마디로 불균질한 장편영화입니다.
사실, 대규모 자본이 흘러들어간 스튜디오 영화의 결과물이 불균질하다는 것 자체가 약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적어도 웰 메이드는 아니니까요. 하지만 우린 불균질한 영화들의 매력도 익히 알고 있습니다.
불행하게도 채피는 영화라는 매채의 불균질함이 주는 활력을 적극적으로 활영하는 방식의 영화는 아닙니다.
3. 채피가 가진 주제의식은 명확합니다. 다음 세대로의 관심이죠. 그런 의미에서 한국 홍보시에 사용한
문구는 사기성이 짙긴 합니다만 순도 100%의 뻥은 아닙니다. 이 영화는 진화론을 기계적 방법을 끼워 넣어
설명해보려 시도하고 있어요. 엉성하다구요? 상관없습니다. 닐 블룸캠프의 영화가 언제는 정교한 맛이 있었나요?
4. 영화가 가지는 두 가지 중요한 이슈가 있습니다. 스스로 생각할 줄 아는 프로그래밍과 (그것의 몸체가
어떤 것이든 상관이 없습니다. 갈아탈 수 있는 몸과 무한한 생명이 그것을 말해줍니다.) 정신의 업로드.
이 두가지는 무에서 유를 만드는 창조의 실질적 핵심과 이미 만들어진 정신의 보존이라는 인간의 욕구를
각각 건드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뇌에 대해 많은 연구를 했고 꽤 성취를 올리고 있습니다만 정작 의식이라는 것이
어디서 비롯되는가. 에 대해선 모호한 상태입니다. 채피는 이 모든 것을 창작자에게 돌리고 있을까요? 아닙니다.
창작자가 바랐던 것은 완벽한 인공지능, 즉 백지의 상태에서 태어나 스스로 학습하고 그에 대한 판단을
온전히 할 수 있는 프로그래밍을 만들었는데 그게 '마음'을 가질 것이라곤 예상하지 못하죠.
이 부분은 헐거운 서사임이 맞습니다. 극 중 제대로 표현이 안 되기도 하고(그렇게 커다란 일인데!!!) 그 과정이
오잉? 한 마디로 넘어가니까요.
5. 그리고 후자인 이미 존재하는 정신의 보존은 최근 들어 잠깐 이슈였던 디지털 사후세계를 떠올리게 합니다.
죽기 직전에 정신을 업로드해서 마치 영원히 천국에서 사는 것처럼 사고하게 만들어주는 기술이죠.
이 이슈는 몇가지 예민한 부분을 건드립니다. 이동이냐 복제냐(복제라면 한 쪽은 반드시 죽음을 경험합니다.)
혹은 존재하지 않는 존재라는 게 어떤 가치가 있냐. 복제된 의식이 진정한 자아이냐. 기타 등등 기타 등등
채피는 이 기술을 영화에 가장 극적인 장치로 끌고 오지만 거기서 파생되는 흥미로운 질문들은 외면해 버립니다.
이 두가지 핵심 이슈를 끌어오면서 얼렁뚱땅 넘기는 것이 블룸캠프에게 기대했던 대자본 SF영화의 기대주라는
타이틀을 뻘쭘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이 정도면 마이클 베이 급인걸? 할지도 모르죠.
6. 대신 채피는 아주 라이트하게 진화론에 기술을 섞는 장난을 칩니다. 다음 세대로의 진화에 기술이 간섭하게
된다면? 정도의 상상력이죠. 채피는 그 과도기에 자리한 네안데르탈인이고 혼혈을 통해서 다음세대의 현생인류
'영원히 사는 인간'이 탄생하게 되는 겁니다. 아주 러프하지만 나름 재미있는 상상력이고
블룸캠프 감독은 이 짧은 아이디어를 장편으로 살리기 위해서 채피의 묘사에 공을 들이고
클라이막스에 자신이 가장 잘하는 것을 섞어 놨어요. 액션이죠.
7. 서글프게도 첫 번째 시도인 드라마에 있어서의 묘사는 실패 실패 대실패입니다.
정해진 결말을 위해 억지스러운 행동을 하는 캐릭터는 글을 쓸 때 가장 주의해야 하는 결과물임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에 나오는 거의 모든 인물들은 말도 안 되는 행동을 하거나 설득력이 떨어지고 간간히 미쳐버리며
똑똑하다가 기습적으로 멍청해지고, 때로는 사회 전체가 기술적 허점이 생겨 버립니다.
이건 그냥 핵심 아이디어에 살을 붙이는 과정에서 큰 실수가 있었다는 것을 얘기해줄 뿐이며
이 프로젝트가 커져가는 과정에서 누군가 제대로 핸들링을 하지 못했다는 방증입니다.
블룸캠프의 시나리오 창작 능력이 엘리시움의 뒤를 이어 그다지 좋지 못하단 걸 증명하는 일이기도 하죠.
8. 영화에 대한 기대감을 쓰레기통에 쑤셔박는 순간 클라이막스가 시작됩니다.
블룸캠프의 액션에 대한 감각은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어요. 그의 액션은 리얼한 묘사를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새로운 감각적 쾌락을 추구하고 액션이 부수고 조지는 역할을 넘어 드라마에 핵심으로 작용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동세대 수많은 감독들이 놓치는 바로 그 지점이죠. 그런 면에서 닐은 자기 이름값을 한 면이 분명 있습니다.
9. 그 외에도 큐티한 주조연 갱단도 재미있고(너무 무식해서 짜증나긴 하지만)
정글이나 다름없게 묘사되는 남아프리카의 뒷골목 묘사도 뭐 나쁘지 않습니다.
이 영화를 에일리언스 같은 SF 액션이라고 생각하고 가면 개실망 할 것이고
공각기동대 같은 철학이 있는 SF라고 생각하고 가도 개실망 할 것이며
디스트릭트 9 같은 새로운 감수성의 SF영화라고 생각하고 가도 실망할 겁니다.
그냥 그럭저럭 볼만한 팝콘무비입니다. 솔직히 휴 잭맨 맞을 때 신나지 않던가요?
+ 저는 어쩐지 이 감독님 영화를 볼 때마다 일본 SF 애니메이션을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 시고니 위버의 팬들이라면 관람을 자제합시다. 에일리언 제작을 위한 포섭이었나?
+++ 로보캅을 왜 언급하는지는 알겠는데... 음.... 뭐.. 그렇습니다.
엄첼
추천인 3
댓글 3
댓글 쓰기정치,종교 관련 언급 절대 금지입니다
상대방의 의견에 반박, 비아냥, 조롱 금지입니다
영화는 개인의 취향이니, 상대방의 취향을 존중하세요
자세한 익무 규칙은 여길 클릭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