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틀 포레스트] 간략후기
익무의 은혜에 힘입어 영화 <리틀 포레스트>를 시사회로 미리 보았습니다.
도시를 떠나 온 고향에서의 사계절과 그 속에서 펼쳐지는 다양한 '먹방'으로 원작이 인기를 끈 지라,
한국영화가 그것을 시각적으로나 정서적으로 잘 재현할 수 있을지가 궁금한 한편 걱정도 됐는데,
일상의 다양한 장면들을 섬세하게 포착하는 임순례 감독 특유의 연출력과
젊은 배우들의 소탈한 생활 연기 덕에 영화는 기대 이상의 결과물로 완성되었습니다.
최근 한국영화에서 만나기 좀처럼 쉽지 않았던 '해독 영화'로 정의할 수 있겠습니다.
김태리 배우의 전작 <1987>이 사람이 아닌 사건이 주인공인 영화였다면,
이 <리틀 포레스트>는 반대로 사건이 아닌 사람이 주인공인 영화입니다.
도시에서의 지친 일상을 뒤로 하고 고향 마을로 돌아 온 혜원(김태리)의 이야기라는 틀 안에서
영화가 중요시하는 것은 사건보다 혜원이 고향에서 보내는 시간 그 자체입니다.
처음 고향 마을에 당도한 겨울부터 봄, 여름, 가을, 겨울 4계절을 지나 다시 겨울까지.
영화는 며칠만 있다 갈 거라던 혜원이 점차 하루, 1주일, 1개월을 지나 꼬박 1년을 나는 과정을
별다른 사건도 없이 시간 따라 계절 따라 차분하게 따라갑니다.
그렇다고 해서 지루한가 싶으면 그것도 아닌 게, 도시에서 돌아 온 혜원이
재하(류준열)와 은숙(진기주) 등 고향 친구들과 나누는 살가운 나날들과
먹을 거리를 직접 심고 기르고 수확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이런 저런 일들을 씨앗 뿌리듯 심어 놓습니다.
사색과 여백의 미를 추구하기 보다는 여유와 부산함이 교차하는
고향 속 일상을 적당한 유머와 그럴 듯한 감정들로 채웁니다.
그리고 당연히 그 중간중간 중요한 부분을 혜원과 친구들이 즐기는 맛있는 먹거리들로 장식하고요.
일본 원작을 한국영화로 옮기면서 정서적인 이질감, 어색함이 들지 않을까 걱정도 됐으나
<리틀 포레스트>는 적절한 현지화 전략으로 단지 상상 속에 머무는 '고향 판타지'가 아닌
우리가 지금도 겪고 있는 현실과 그리운 고향이 은근하게 접점을 이루는 공감 영화가 되었습니다.
도시에서의 일상으로부터 거의 도망치다시피 하며 혜원은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고향은 그런 혜원의 마음을 완벽하게 치유해 주는 이상적인 낙원의 모습만 하고 있진 않습니다.
젊은 여성이 살다 보면 맞닥뜨릴 수 있는 (의도와 상관없이) 당황스러운 순간들도 있고,
농사를 짓는다는 것이 '귀농' 같은 단어로 예쁘게 포장될 수만은 없는,
자연의 갑작스런 변덕으로 미처 준비하지 못한 채 실망스런 결과를 맞이해야 하는 때도 있습니다.
그 모든 과정들이 혜원에게는 '이 곳에서 한 계절만 나기에는 아쉬운' 좋은 이유가 되는 셈입니다.
적어도 4계절을 한번씩은 다 겪어봐야 알 수 있는, 삶의 얼굴들이 혜원의 고향에 있습니다.
자칫 세상물정 모르고 뜬구름 잡는 힐링무비가 될 수도 있는 내용이지만,
<리틀 포레스트>는 쉬운 대사들로 불현듯 관객의 마음을 쿡쿡 건드리며
때론 웃게 하고 때론 곰곰이 생각에 잠기게 합니다.
"배고파서 돌아왔다", "고모는 이모가 아니라 고모다", "떠나온 게 아니라 돌아온 거다"와 같은
영화 속 대사들은 구태여 분위기를 잡지도 않고 주인공의 입을 빌어 불쑥불쑥 튀어나오지만,
그것은 마치 작정한 사색이 아닌 일상의 편린 속에서 문득 튀어나오는 깨달음처럼
갑자기 나와서 잔잔하게 오래 마음에 남습니다.
이는 좋은 말은 으레 자리 깔고 힘주어 말하던 일본 콘텐츠를 원작으로 한 영화로서
매우 흡족한 현지화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덧붙여 원작이 인기를 끈 또 하나의 큰 요소인 음식에 대한 묘사도 수준급입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삼시세끼> 같은 TV 콘텐츠가 음식을 주제로 이미 큰 인기를 얻었다는 점에서
영화가 새삼 그런 측면에서 차별화한다는 게 쉽지 않았을 텐데,
<리틀 포레스트>는 배춧국, 수제비, 떡볶이 같은 일상적인 음식부터, 막걸리, 떡, 꽃튀김, 밤조림,
오꼬노미야끼, 크렘 브륄레 등 독특한 요리 과정을 지닌 음식들까지 다양한 종류의 음식들을
정갈하고 생기 있게 그려내며 배부른 사람이 보고 있어도 입맛을 다시게 합니다.
<리틀 포레스트>가 전하는 이야기는 현실을 잠시동안 잊자는 식의
다소 무책임한 힐링 코드와는 거리가 좀 있습니다.
혜원이 고향에서 보내는 일상 속에는 끊임없이 도시에 남겨두고 온 듯한 일상의 잔영이,
자신이 독립하기도 전에 집을 떠나 간 엄마(문소리)의 흔적이 나타나는데
이를 통해 혜원은 살면서 떠나간다는 것과 돌아온다는 것은 무엇인지,
내가 뿌리를 내리고 줄기를 뻗음으로써 각각의 세상은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지를 고민하게 됩니다.
무조건 어디론가 진출해야만, 지금 있는 곳으로부터 벗어나야만 잘 사는 것이라고 인식하기 마련인
우리에게 '잘 돌아오는 법'을 묻는 이 영화의 질문은 반갑게 되새겨 볼 만한 것이었습니다.
영화의 중심부를 이루는 젊은 배우들의 생활 연기 또한 이 영화를 기분 좋게 만듭니다.
주인공 혜원 역의 김태리 배우는 지금까지 맡은 역할 중 가장 현실의 젊은이와 가까운 인물을
오버스러움이 거의 없이 현실 속 우리들의 태도와 매우 맞닿은 디테일로 그려냅니다.
몹시 유니크한 캐릭터로 스크린에 데뷔해 수준급의 일상 연기에까지 다다른 그녀의 모습에
2년도 채 되지 않은 시간동안 보여준 연기의 스펙트럼이 대단하다는 것을 실감합니다.
혜원의 고향 남사친 재하 역의 류준열 배우는 그를 스타덤에 올린 드라마 <응답하라 1988> 속
'정환'에 약간의 활기를 더한 듯한 캐릭터를 털털하게 연기하며 극에 활력을 불어넣습니다.
여기에 혜원의 또 다른 고향 친구 인숙 역의 진기주 배우도 살짝 엉뚱하고 예민한 듯도 하지만
친구 좋다는 건 잘 알고 있는 의리 있는 캐릭터를 당차게 표현했습니다.
이 세 배우가 보여주는 호흡은 흡사 진짜 친구 사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끈끈합니다.
혜원의 엄마 역으로 출연한 문소리 배우는 이들이 만든 생기 속에 진득한 여운을 그리고요.
최근 한국영화들은 정서가 다소 험하거나, 밝다가도 리얼리즘에 대한 집착을 못 버린 채
감정을 한번은 절망적으로 떨어뜨리게 마련인 영화들이 주류를 형성했는데.
<리틀 포레스트>는 그런 부분이 전혀 없이 시작부터 끝까지 보는 이를 기분 좋게 합니다.
외국영화에서 종종 발견되는 소위 '힐링 영화, 해독 영화'의 좋은 예를
우리나라에서는 찾아보기 쉽지 않아 아쉬웠는데,
<리틀 포레스트>는 우리나라가 그런 영화를 못 만드는 게 아니라 안 만드는 것이었음을 보여줍니다.
사계절과 사람을 사랑한다면 누구라도 환영할 영화입니다.
익무 덕에 좋은 영화 잘 보았습니다.
추천인 27
댓글 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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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를 읽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정화되네요* 사계절의 아름다운 풍광에 눈은 행복해지고 맛깔난 먹방에 입맛 다시고 정서적 공감이 극대화되는.... 시각, 청각, 미각, 공감각을 모두 채워주는 영화일 것 같습니다
요즘은 영화보면서....이건 영화지...아..이건 저래서 그런건가???이런건가???같은 잡생각들을 많이 하는데~
간만에 아무 생각없이 몰입해서 영화 한편 편안하고 즐겁게 잘 보고 왔습니다. ^^
후기 잘 읽었습니다.
후기도 따뜻한 느낌이 나서 좋네요. 기대허고 있습니다. 요즘처럼 즐거운 일이 잘 없는 시기에는 좋은 힐링 영화가 될 거 같아요.
바라던 그림을 보고 일상을 되돌아볼 수도 있는 영화가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글이 너무 술술 잘 읽히네요 후기 공감되고 좋아요
잘 읽히셨다니 다행입니다 ㅎㅎ 감사합니다!
와 후기가 다 좋네요. 이런 힐링 영화가 흥행을 할지 궁금하네요
좋은 결과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역시 오늘도 멋진 후기 감사합니다 ㅎㅎ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참..... 저도 한때는 글 좀 써봤다는 사람인데.....
정말 짐마니님 후기들을 볼때마다 정말 큰 축복 받으셨다는 생각을 감출 수가 없네요...ㅎㅎㅎ
설연휴 앞두고 영화 덕에 참 기분 좋은 밤이네요~~ ^^
과분한 말씀 감사할 따름입니다ㅠㅠ
좋은 영화를 만난 날 밤은 늘 기분이 뿌듯하네요.^^
정말 먹음직스러운 비주얼들의 습격이...!!
후기 잘봤습니다 기대하고 있는 영화인데 평이 좋은것같아 안심이 되네요
감사합니다. 기대에 부응할 영화가 아닐까 싶네요.^^
좋은 리뷰 잘 읽었습니다. 저도 시사회로 보고 왔는데 힐링 무비 그 자체였어요
감사합니다. 하루의 피로를 풀어주는 기분 좋은 영화였습니다.^^
좋은 후기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기분 좋은 말들만 하고 싶어지는 그런 영화였네요.^^
분명 나중에 좋은 평가 나올거라
생각했는데...익무에서도 좋은 평가 받아서 좋네요.
항상 후기 잘 읽고 있습니다.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역시 블시 때부터 그 싹(?)이 보였던 영화로군요 ㅎㅎ
정성스런 후기
후기 좋네요
후기 감사합니다!
글 잘 봤습니다. 영화 보고 싶어지네요.^^
정성스럽게 올리신 후기를 보니 현지화가 잘 된 영화 같군요.
후기 완전 정독했습니다. 영화 너무 기대되네요
잘 읽히셨다니 다행입니다 ㅎㅎ 감사합니다!
정성스러운 글 잘 봤습니다~최근 한국영화가 너무 유사한 톤앤 매너로 흘러 아쉬었는데 리틀포가 새로운 힐링이 될 듯 하네요.
이런 영화도 잘 되어서 또 하나의 트렌드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이런 영화들이 많이 나오게 하기 위해서라도 독과점이 법으로 금지돼야 합니다!
정성스런 후기 정독 했습니다. 전 아직 못 봤는데, 기대 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