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기증]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이 빚어낸 파국
'현기증'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보고 왔습니다. 이돈구 감독의 전작인 '가시꽃'을 아직 못봤지만 보신 분들은 굉장히 인상적인 작품이었다며 호평을 아끼지 않아, 감독님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는데요, 일정도 맞고 김영애, 도지원, 김소은, 송일국 등 '현기증'에 출연하고 배우들 또한 면면히 화려해서 부산에서 영화를 관람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11월에 개봉한다는 사실을 미리 알았더라면 부산에서 관람하지 않았을텐데... 영화제 기간 중에는 이 영화의 개봉 일자가 잡혔다는 사실을 몰라서, 굳이 영화제에서 보고 왔네요. '현기증'은 영화의 긴장감을 끝까지 이끌어나가는 역량이 꽤나 인상적인 영화였습니다.
순임(김영애)은 큰 딸 영희(도지원)와 사위 상호(송일국), 그리고 고등학생인 작은 딸 꽃잎(김소은)과 살고 있습니다. 오랜 기다림 끝에 영희가 아기를 낳자 가족 모두는 행복감에 젖게 됩니다. 하지만 순임의 치명적인 실수로 아기가 죽는 사고가 발생하게 되는데요, 심한 죄책감과 공포감에 순임은 자신의 죄를 침묵하고 가족들은 그런 엄마에 분노하게 됩니다. 순임은 점점 감정조절이 어려워지고 가족 모두는 각자 직면한 자신의 고통 때문에 서로를 배려할 여유조차 잃어갑니다. 그들이 맞이할 파국의 결말은 과연 무엇일까요?
이 영화가 꽤나 인상적인 영화가 될 것이라는 사실은 영화의 오프닝 시퀀스에서부터 예측할 수 있는데요. 식탁에서 네 주인공이 밥을 먹는 장면인데, 5~10분 정도 되는 시간을 원테이크로 이어가는 장면입니다. 이 장면이 굉장히 중요했던 이유는, 각 인물의 성격과 그들이 처해있는 상황까지 식사 시퀀스에서 제대로 드러나기 때문이죠. 깜빡깜빡하는 엄마와 임신으로 인해 신경질적인 언니 영희, 그런 언니와 사이가 좋지 않은 여동생 꽃님이와 어색한 분위기를 달래려고 썰렁한 개그만 내뱉는 사위 상호까지. 영화의 오프닝 시퀀스만으로도 영화의 전개 상 중요한 정보들, 그리고 앞으로 더 무시무시한 일이 벌어질 것이라는 사실까지 쉽게 예상할 수 있었습니다.
'현기증'은 느릿하면서도 스멀스멀 영화의 긴장감에 불을 붙이더니, 중후반부에 들어서는 보는 제가 불편할 정도로 긴장감을 극한으로 몰아부치더군요. 특히 영화 첫 장면부터 끌어냈던 긴장감을 영화가 끝날 때까지 한 순간도 놓치지 않고 끌고간다는 점이 이 영화가 지닌 강점입니다. 사실 영화의 설정 자체가 작위적이라고 느낄 수도 있을 정도로 자극적이라서 그렇게 느꼈을 수도 있지만, 실화를 바탕으로 한 작품을 제외하고, 순수하게 영화의 힘만으로 이렇게 영화의 긴장감을 끌어올릴 수 있었던 독립영화는 참 오랜만에 보는 것 같습니다.
이 영화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점은 김영애와 도지원의 갈등 구도였습니다. 임신으로 인해 가뜩이나 예민해져있다가 힘들게 낳은 아이를 잃는 슬픔까지 극한의 감정을 겪는 도지원씨와, 자신의 실수로 인해 손자를 잃게 되었다는 죄책감을 속으로 삭히는 김영애씨의 연기 대결은 이 영화의 긴장감을 극한으로 이끌어나가는 중요한 원동력인데요, 두 배우 모두 신들렸다는 표현보다 더 적합한 표현을 찾기 어려울만큼 극강의 연기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김소은씨나 송일국씨는 김영애씨와 도지원씨의 기 센 연기 대결에 다소 묻힌 감이 있으나, 캐릭터와 잘 어울리는 느낌이기도 하고, 안정적인 연기력으로 묵묵히 제 몫을 다해내고 있습니다.
이 영화는 사소한 트릭을 통해, 관객들의 뒤통수를 치는 결말을 선보이고 있는데, 생각해보면 감독은 영화의 복선도 잘 깔아놨어요. '현기증'은 3억이라는 제작비로 만들어진 독립영화인데, 이 영화가 독립영화라는 사실을 의식하지 않고 보면 '현기증'은 일반적인 상업영화가 추구하는 재미도 두루 갖추고 있는 작품입니다. 특히 이돈구 감독은 '현기증'이라는 작품을 통해, 장르 영화 연출에 탁월한 재능이 있다는 사실을 제대로 보여주고 있어, 앞으로 좀 더 제작비가 많이 들어간 상업영화에서 자주 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이 빚어낸 파국, '현기증'은 11월 6일 전국 극장에서 개봉할 예정입니다.
* 부산국제영화제에서 '현기증'을 보고 난 후, 오랜만에 영화의 스틸사진을 보는데... 스틸컷만 봐도 배우들의 긴장감이 느껴지시지 않나요...? ㄷㄷ
저도 부산에서 봤는데 영화내내 불안과 긴장감이 지속되더군요.
계속 어떤 일이 일어날걸 암시하다보니 제발 일어나지 마라 라고 혼잣말을 하게 되더라구요 ㄷ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