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크모드
  • 목록
  • 아래로
  • 위로
  • 댓글 2
  • 쓰기
  • 검색

<화장>, 유령들의 그림자놀이

tioto
1328 2 2

임권택은 지속적으로 한국인의 예의에 관해 말해온 바 있다. 가령 <길소뜸>의 한 장면. 아내 몰래 첫사랑을 만나고 들어온 남자에게 아내가 추궁을 하자 남자가 그 사람 만나고 왔소.”라고 읊조리는 장면에서 임권택은 남자의 얼굴을 화면 밖으로 잘라내는 프레임을 선택했다. 그리곤 (정성일 평론가와의 유명한 인터뷰를 통해) 덧붙인다. “그게 한국사람이 상대방을 보는 방법이요. 그 속이 뻔히 보이는 부끄러운 대답을 하고 있는 사람의 얼굴을 내가 어떻게 빤히 들여다본단 말이요.” 때로 그의 영화에서 미학보다 중요한 것은 한국인으로서의 윤리의식이었다.


그러나 임권택의 102번째 영화 <화장>은 정반대의 시선을 견지한다. 인간으로서 감당하기 힘든 치부를 드러내는 순간(뇌종양에 걸린 아내가 배설물을 흘리고 오상무는 이를 아무런 감정 없이 닦아내는)에서 임권택의 카메라는 행위가 시작되고 끝날 때까지 이를 지켜본다. 이 긴 응시는 지나치게 건조하고 차갑다. 이 시선에는 특정한 가치판단이 개입하지 않는다. 배설이라는 가장 기초적인 행위를 감당해내지 못하는 육체. 임권택은 이 육체를 마치 시체처럼 바라본다. 이때 오상무는 특정한 사물을 다루는 일종의 전문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 변화에서 임권택의 시선이 옮겨간 궤적을 유추해보고 싶어진다.


영화의 첫 장면은 사막과도 같은 황량한 풍경에서 진행되는 상여 장면이다. 죽은 아내가 관 속에 누워 있고, 남편인 오상무가 걸어가다 문득 뒤를 돌아보면 그의 시선에는 추은주가 있다. 이 프롤로그를 단순히 본편에 대한 압축이라고 정리할 수 있을까. 주지해야 될 것은 이 장면이 한 번 더 반복되면서 이것이 오상무의 환상임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이 환상이 등장하는 맥락은 다음과 같다. 아내의 입관이 끝나고 화장을 기다리고 있을 때, 오상무의 처제가 꽃상여는 못 태워줄망정 화장은 너무 잔인하다고 일갈한다. 이때 카메라는 오상무의 얼굴을 향해 줌인으로 다가가고 (처제가 말한) 상여행렬이 환상으로 펼쳐지고 프롤로그가 반복된다. 말하자면 아내에 대한 죄책감에서 비롯된 환상에서조차 오상무는 미진한 시선으로 추은주를 소환한다. 이 환상은 삭막한 인상을 준다. 사막과도 같은 환상의 이미지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배치되는 방식 때문에 그러하다. 오상무는 반복해서 그 자리, 그 구도 안으로 되돌아간다. 그것이 아내에 대한 부채의식을 의식하고 전개되는 환상에서조차 자꾸만 뒤를 돌아보고 추은주를 쳐다보는 무의식이 등장하는 것을 막을 수 없도록 만든다.


오상무는 자꾸만 되돌아간다. 영화 초반, 클럽에서 회식이 끝나고 택시를 타고 돌아가는 오상무에게 추은주가 상품으로 받은 지공다스 와인을 선물한다. 택시를 탄 오상무는 뒤를 돌아보며 추은주의 미소 짓는 얼굴을 본다. 이에 매혹된 오상무는 택시를 돌려 그 자리로 되돌아간다. 오상무가 클럽 앞으로 돌아갔을 때, 그의 후경으로 추은주가 입은 것과 동일한 색의 코트를 입고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한 한 여자가 배치되어 있다. 후경의 여자는 포커스가 맞지 않아 흐릿하게 보이며 관객이 순간적으로 이를 추은주로 오인하게 하는 착시효과를 낸다. 관객의 착시는 오상무의 착시로 전이된다. 추은주를 만나는 것에 실패하고 다시 택시를 타고 병원으로 향하는 오상무가 창문 너머로 걷고 있는 추은주를 목격한다. 오상무는 황급히 택시를 세워 거리로 나서지만 곧 그것이 환상이었음을 깨닫는다. 이 장면 이후 영화는 홀로 와인병을 들고 모텔촌을 거니는 오상무의 얼굴을 거의 멈춘 듯한 슬로우 모션으로 담아낸다. 그는 무엇에 홀린 것이며, 지금 무엇을 보고 있는 걸까. 욕망은 자꾸만 그를 멈춰 세우고 되돌아가기를 명령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아내가 쓰러진 이후, 오상무가 단 한 번도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다는 점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플래시백을 통해 오상무와 아내가 아침식사를 하는 장면에서 짧게 등장하기는 한다). 그는 영화 내내 병원과 모텔과 장례식장을 오가며 잠을 청하고 피로를 호소하지만, 집으로 돌아가서 휴식을 취하는 장면은 등장하지 않는다. 결말에 이르러서야 아내의 부탁을 수행하기 위해 의례처럼 마당에서 보리를 데리고 나오지만, 그때조차 집 안으로 들어오려 하지 않는다. 이 에필로그에서 오상무는 마치 집에서 추방당한 사람처럼 느껴진다. 말하자면 그는 정착할 곳을 잃었다. 피로한 육체와 욕망을 향한 상념을 이끌고 모텔촌을 거닐던 오상무는 그 피로를 껴안은 채 곧바로 다음 장면에서 회사에 있어야 한다.


추은주의 결혼소식을 듣고 결혼식 날짜를 피해 도피하듯이 찾아간 지방출장 시퀀스에서의 전개는 앞선 논의들의 근거로 기능한다. 이 대목은 원작 소설과 다소 차이를 두며 진행된다. 소설이 오상무가 총판장들과 룸살롱에서 모여 여성들과의 외설적인 상황을 묘사했다면, 영화는 룸살롱 대목을 삭제하고, 콜걸을 보내는 오상무의 모습을 묘사한다. 대신 소설이 중점적으로 두었던 것이 오상무의 황폐한 내면이라면, 영화가 비중을 두어 강조하는 것은 오상무와 아내, 추은주의 감정선이 오고 가는 활동이다. 모텔방에서 콜걸을 보낸 오상무는 아내와 통화를 한 뒤, 술에 취한 채 등대가 홀로 서있는 황량한 바닷가의 풍경을 바라보며 추은주에 대한 환상에 빠져든다. 오상무가 이 환상에서 깨어나는 것은 병실이다. 이 꿈은 입구와 출구가 불일치하다. 마치 악몽에서 깨어나듯이 몸을 뒤척이는 오상무를 향해 일어나있던 아내가 (추은주에게 받은) 와인에 대해 묻는다.


모텔에서의 환상에서 병실로 넘어오는 대목은 영화에서 활동하던 요소들이 미묘하게 집합하는 순간이다. 추은주를 갈망하던 오상무는 마치 외도를 들킨 것처럼 반응하고(이 반응은 추은주의 추천서를 써주는 장면에서 반복된다) 그동안 시체처럼 병실에 누워있던 아내가 뭔가 알고 있는 듯이 오상무에게 와인에 대해 캐묻는 모습은 이례적이고 낯설다. 또한 아내가 창문 앞에 앉아 와인을 마시는 모습은 아내의 수술 직후 창문 앞에서 소주를 마시던 오상무/오상무를 앞에 두고 같은 종류의 와인을 마시던 추은주의 모습을 동시에 연상시키면서 느슨하게 연결된다. 말하자면 영화를 구성하고 있는 세 개의 선이 특정한 시간차를 두고 겹쳐지는 순간인 것이다. 일반적으로 보자면 이는 추은주를 욕망한 오상무의 비루한 현재의 자리를 환기시키는 현실을 곧바로 연결한 탁월한 편집으로 볼 수도 있겠으나, 세 인물이 미묘하게 상기 되어지는 방식과 돌출적인 아내의 모습에서 이 장면을 또 다른 무의식의 발현처럼 보도록 만든다(이 영화에서 대개의 환상장면은 술을 마시고 진행된다. 맥주를 마시고 환상에 돌입하게 된 오상무와 마찬가지로 이 장면의 아내는 와인에 취해있다). 추은주에 대한 환상이 갈망하는 것과 닿아있다면, 병실에서의 환상은 차마 보고 싶지 않은 수면 아래의 감정을 끌어올리는 장면이다. 오상무는 자신이 죽었으면 좋겠냐는 아내를 진정시키면서도 아내의 질문에 대답하지 못한다.


물론 원작에서 그대로 가져온 관계이기는 하나, 영화 <화장>의 세 인물의 관계도는 임권택의 전작 <달빛 길어올리기>에서 이미 보았던 것이다(굳이 더 거슬러 올라가자면 <길소뜸>의 화영(김지미)과 동진(신성일)과 그의 아내의 관계도에서 유사성을 찾을 수 있다). 병에 걸린 처, 처를 돌보면서도 또 다른 욕망에 사로잡히는 남자, 남자의 또 다른 욕망으로서의 여자의 도식은 <달빛 길어올리기>의 효경(예지원)-필용(박중훈)-지원(강수연)의 관계도와 <화장>의 아내-오상무-추은주의 관계도를 종합할 수 있는 도식이다. <달빛 길어올리기>에서의 핵심은 효경과 지원을 대비되는 세계로 두고 이 둘을 오가는 필용을 따라간 뒤, 그 모든 대비와 충돌을 하나로 끌어안고자 했던 마지막 장면에 있었다. <화장>에서 관계망의 활동은 다소 미묘해졌다. 마찬가지로 오상무가 죽음으로 표상되는 아내와 성애로 표상되는 추은주의 세계를 오가고 있기는 하나, 이들에게는 정확히 정착할 수 있는 고정점이 없다. <달빛 길어올리기>에서는 효경과 지원의 집(전통 한옥과 현대식 오피스텔)을 통해 필용이 오가는 두 세계의 고정점을 설정하고 그 의미를 표상했다. 그러나 <화장>에서는 돌아갈 수 있는 고정점, 간단하게 말하자면 그들의 집이 제시되지 않는다. 고정점이 사라진 인물들은 환상을 방식을 불러내며 이곳저곳을 오가며 유령처럼 출몰하기 시작한다. <화장>은 육체의 실패를 경유하여 유령에 관해 말하는 영화다. 어쩌면 영화에서 제시되는 환상은 그 비루한 육체를 회피하기 위한 시도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가령 추은주가 지공다스 와인을 설명하면서 카메라가 오상무의 얼굴을 향할 때, 그것은 노골적으로 오상무에 대한 찬사로 직결된다. 그런데 누가 이를 결합시키는 것일까. 오상무는 몽롱하게 취해있으며 추은주는 오상무를 바라보고 있지 않다. 그런데 이는 특정하게 오상무를 향한 추은주의 마음으로 보도록 설계되었다. 다음 장면에 음악이 흘러나오면 환상과 주체와 대상이 바뀐다. 이번엔 오상무가 춤을 추는 추은주의 모습을 보며 정념에 빠져들게 된다. 이들은 환상을 통해 유령처럼 오고 간다.


같은 관계도를 지닌 <길소뜸>, <달빛 길어올리기> 등과 <화장>의 차이점은 <화장>의 주인공이 부유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상무에겐 돌아갈 수 있는 집이 없지만 소호리의 별장이 있다. 이 장소는 <길소뜸>이나 <달빛 길어올리기>에서는 부재했거나 불가능했던 섹스가 (비루한 형태로나마) 가능해지는 곳이다. 뇌종양에 걸려 배설물을 제어하지 못하는 자궁과 전립선 비대증에 걸려 제대로 발기가 되지 않아 비아그라에 의지해야 하는 성기의 비루한 섹스. 심지어 섹스를 하기 위해 별장으로 올 때, 차 안에서 이들이 한 대화는 아내가 창문을 열자 남편이 추워라고 한 마디 내뱉은 것이 전부이다. 아내가 뇌종양으로 쓰러진 이후, 이들의 관계를 가장 잘 드러내고 있는 것은 아침식사에서의 대화일 것이다. 자신이 죽고 나면 애완견 보리를 같이 보내달라는 아내의 말에 오상무는 아무런 감정 없이 대꾸한다. “걱정 마, 안락사 시킬 거니까. 당신 가고 나면.” 이 대화는 과도하게 차갑다. 부부 간의, 아니 사람 사이의 대화라고 하기엔 어색하다. 이들은 인간적 관계로 보이지 않는다. 배설, 식사, 추위, 섹스, 그리고 이미 예정되어 있는 죽음 등 오상무와 아내는 지극히 기초적이고 감각적인 차원에서의 행위만을 공유한다. 여기엔 어떠한 감정도 들어있지 않다. 그들은 동물화 된 관계이다.


흥미로운 것은 별장에서 섹스를 하던 도중, 오상무가 또 한 번 추은주의 환상을 떠올린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소호리의 별장은 세 인물들이 시각적으로 공존하게 되는 장소인 것이다. 앞서 병실 장면에서도 아내는 추은주의 ()존재를 의식한 바 있지만 이는 심리적인 차원에서 시간차를 두고 발생한 것이었다. 이들의 섹스 장면은 허공을 바라보며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 같은 아내의 얼굴을 길게 비추면서 끝난다. 아내의 이 얼굴은 자신과 섹스하면서 추은주의 나체를 떠올린 오상무의 정념을 파악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섹스를 하는 오상무의 몸과 감정은 분리되어 있으며 그는 유령처럼 추은주를 갈망했을 것이다. 영화는 단순히 오상무와 추은주가 감정적으로 공유하고 서로 통하는 과정을 그려내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추은주에게 이끌리는 오상무의 감정을 통해 (그의 텅 빈 몸을 안고 있는) 아내가 이를 파악할 수 있도록, 말하자면 아내가 오상무의 텅 빈 육체를 경유하여 추은주라는 존재를 인식하도록 네트워크를 설정해둔다.


그들의 유령적 성질을 강조하는 것은 오상무와 추은주의 동행 장면이다. 임권택은 전작에서 종종 자동차를 타고 남녀가 동행하는 장면에 비중을 두어 관계의 진전을 보여준 바 있으며 심지어 <족보>에서는 충분히 한 쇼트으로 넘길 수 있었던, 젊은 사람이 어른을 찾아가는 과정을 굳이 이를 찾아가는 단계의 쇼트를 삽입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연출가이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오상무와 추은주가 차를 타고 함께 하는 동행은 좀 이상할 정도로 간결하게 넘어간다. 영화에서 추은주와 오상무의 동행은 두 번 등장한다. 추은주가 회사에서 소개된 뒤, 오상무가 추은주를 바라보는 시점숏으로 씬이 끝난 다음 곧바로 오상무와 추은주가 함께 소비자협회에 도착하는 장면과 추은주의 파혼 이후 오상무와의 식사를 끝마치고 돌아가는 장면. 이들이 동행하는 과정은 철저하게 생략되어 있다. 그들은 차 안에서라도 온전히 정착할 수 없다는 듯이. 이는 그들의 감정적 교감을 환상을 통한 추상적인 방식으로 진행하겠다는 연출적 선택인 동시에 이전 장면에서 택시를 타고 가던 오상무가 창문 너머로 보았던 추은주의 환상과 결말부 소호리 별장에서 옆에 서있는 오상무를 지나치고 차를 타고 떠나가는 추은주의 구도를 강조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배제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그간 함께 공존할 수 없었던 두 세계의 충돌이다. 영화는 종종 두 인물의 대화에서 침묵하는 순간이나 답변을 채 말하지 않은 순간에서 장면을 끝내버리고 넘어가는 편집을 사용한다. 이는 오상무가 아내와 추은주라는 두 세계를 오가는 방식과 근접한 것이다. 마치 두 세계를 칼로 자르듯이 가로질러 막아두었던 편집의 방식이 초호리 별장에서는 사라진다. 앞서 말했다시피 <달빛 길어올리기>에서는 천년한지를 만들기 위해 세속적 장소를 벗어나 산으로 올라가 모든 대비적 요소들을 하나로 끌어안았다. <화장>에서는 봉합을 위한 적절한 장소가 마련되지 않았다. 대신 초호리의 별장은 서로 다른 시간과 서로 대비되는 세계가 혼재되는 장소이다. 반복되는 환상으로서의 상여장면을 마치고 영화는 별장으로 돌아온다. 그곳에서 오상무는 아내가 생전에 자신에게 보낸(추은주가 마시던 것과 동일한) 와인을 발견한다. 지공다스 와인은 추은주에서 오상무에게로, 아내에서 또 다시 오상무에게로 돌아오게 된다. (추은주의 설명에 의하면) 오상무와 유사한 성질을 가진 그 와인은 오상무에 대한 추은주 의 감정을 표상하는 것에서 이제는 오상무에 대한 아내의 감정을 떠오르게 하는 사물로 끊임없이 자신의 의미를 바꾼다.


죽은 아내가 보낸 와인이 배달되고, 추은주가 찾아온다. 죽음으로부터 찾아온 선물, 지나치게 근접해오는 욕망. 두 세계의 충돌 앞에서 오상무는 그 왜소한 몸을 쭈그리고 앉아 초조해한다. 오상무는 두 유령의 흔적을 지워냄으로써(아내의 유품 불태우기/추은주의 문자 지우기) 온전한 그림자가 되어간다. 추은주가 별장으로 도착하면 문이 반쯤 열려져 있고, 탁자 위엔 와인과 과일이 차려져 있다. 그런데 다음 쇼트는 별장 밖으로 나가는 오상무를 창문 안에서 지켜보는 장면이다. 여전히 추은주는 오상무의 기척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에 이것은 추은주의 시선이 아니다. 영화는 어떠한 설명도 덧붙이지 않고 홀로 걸어 나온 오상무와 곧이어 차를 타고 가며 옆에 서 있는 오상무를 무시하고 떠나가는 추은주를 끝으로 이 시퀀스를 끝낸다.


이 종결 방식은 좀 이상하다. 두 인물이 같은 시간에 함께 있었다기엔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힘든 전개일 뿐만 아니라 물리적으로도 다소 어색하다. 와인상을 차려놓은 이유는 무엇일까. 오상무가 걸어 나가는데도 추은주가 이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 가능한가. 무엇보다 추은주는 어떻게 소호리의 별장의 위치를 정확히 알고 찾아온 것인가. 이 시점에서 소호리의 별장이 환상과 혼재의 장소임을 다시 지적하고 싶다. 과장을 부려보자면 이 장면이 어쩌면 서로 다른 시간대에 벌어진 일을 하나의 화면 안에 풀어놓은 시도라고 생각해보면 어떨까. 선행적인 시간으로 정리하자면 오상무는 와인상을 차려두고 이미 떠나간 뒤이고, 그 이후에 추은주가 찾아온 것을 영화 안에서 교차편집을 통해 재배치하고 있다는 가설이다. 별개의 시간들과 독립된 세계들이 함께 혼재되고 있는 곳. 마지막 별장 안에서 오상무와 추은주는 한 쇼트 안에서 함께하지 못한다. 절대적으로 분리되었던 세계와 시간이 합쳐지면서 만들어내는 우스꽝스럽고도 차가운 장면이 바로 앞서 말한 오상무를 지나치고 가는 추은주의 모습이다. 이것은 다른 시간대에 거기 있었던 두 인물을 하나의 화면 안에 둔 결과이며 곧 오상무와 추은주의 결합의 불가능을, 오상무의 욕망의 불가능함을 말한다. 이 장면은 영화의 초반부 클럽에서 나온 오상무가 택시 타고 가다가 추은주의 환상을 보는 장면과 대구를 이룬다. 그전 장면의 추은주가 환상이었던 것처럼, 이 마지막 장면의 오상무도 (유령 같은 존재로서의) 환상의 일종이 된다.


검은 옷을 입고 거의 그림자처럼 보이는 오상무의 멈춰진 몸은 추은주와 아내가 떠나가면서 인간적 욕망/동물적 행위가 거세당한 자의 식물적 풍경이다. 추은주를 위해 정갈하게 차려진, 정물화에 가까운 와인상은 곧 오상무의 멈춰진 처지를 대변한다. 아내의 지갑에서 꺼낸 작은 사진에서처럼 그는 움직일 수 없으며, 갈 곳 없이 갇혀있다. 사진 안에서 그의 얼굴은 웃고 있으나 침묵하고 있으며 물성을 박탈당해 있다.


임권택은 어쩌면 유작일지도 모르는 작품에서 인간적 성질을 박탈당한 유령을 포착해냈다. 임권택은 죽음을 다루면서 어떠한 장식도 덧붙이지 않고 동물의 세계를 응시하듯이 감정이나 판단을 개입해두지 않는다. 영화는 서두에서 말한 임권택의 예의의 시선이 점차 걷어내어지는 과정을 오상무의 병수발 장면을 통해 서늘하게 보여준다. 세 장면이 인상에 남는다. 하나는 수술 직후, 오상무가 딸과 떡볶이와 순대를 먹다가 아내가 변을 보는 장면이다. 오상무는 먹던 것을 중단하고 전문가스러운 능숙함으로 이를 뒤처리한다. 카메라는 멀리서 건조하게 이를 지켜본다. 이 장면이 섬뜩해지는 순간은 옆에서 차마 쳐다보지 못하던 딸이 울면서 퇴장할 때, 그동안 자고 있는 줄 알았던 아내가 딸이 나간 방향을 바라보며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나오는 것을 클로즈업으로 포착하는 대목이다. 시체에 가까워진 육신과 아직 살아있는 의식을 분리하여 보여주는 장면. 이 장면에서 문득 찰리 채플린의 유명한 말 영화는 풀 쇼트로 보면 희극이고 클로즈업으로 보면 비극이다.”가 떠올랐다. <화장>에서 풀 쇼트는 비극이고, 클로즈업은 비극에 주름과 깊이를 더한다. 이 장면에서 의식은 살아있지만, 시체와도 같은 육체를 지닌 아내가 견뎌내야하는 고통에 대해 (감히) 가늠하게 된다.


두 번째 장면은 오상무가 추은주의 결혼식을 피해 12일로 지방에 내려가기 전에 병실에 들려 처제와 말하는 장면이다. 이때 오상무는 추은주에 대한 자신의 감정 때문에 도피하듯이 일정을 잡은 상황이고 처제와 아내에게 이를 사실대로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 오상무 앞에서 아내는 구토를 하고 처제는 간호인을 하루만 더 쓰라고 부탁한다. 이 장면에서 아내가 다시 구토를 하자 처제가 카메라가 바라보고 있는 쪽의 커튼을 친다. 이때 카메라, 곧 관객은 저 안을 볼 수 없게 된다. 이는 임권택이 이전까지 견지해오던 예의의 문제와 직결되는 선택이라 말하고 싶어진다. 커튼 속으로 아내의 치부와, 오상무의 부끄러움이 숨겨진다. 그것을 곧바로 바라보지 않는 것이 임권택이 말하고자 하는 예의였을 것이다.


앞선 두 장면에서 임권택은 인간에 대한, 그들이 마주하고 있는 죽음과 욕망에 대한 예의를 갖춘다. 그러나 세 번째 장면. 장례식장에서 딸이 오상무에게 뭐가 제일 고통스러웠느냐?” “아빠는 엄마를 사랑한 적 있느냐등을 물어보는 장면 다음에 플래시백으로 화장실에서 아내의 배설물을 오상무가 닦아주는 장면이 길고 힘겹게 제시된다. 이 장면에서 임권택은 어떠한 치장도 덧붙이지 않는다. 오히려 보고 싶지 않은 치부와 부끄러움까지도 관객을 향해 가감없이 보이도록 배치한다. 일체의 감정도 없이 그저 거기 있는 행위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가히 비인간적이고 유물론적인 시선. 피사체들이 격렬한 행동을 치루고 있고, 눈물을 터트리며 감정의 밑바닥을 보여주고 있음에도 임권택의 카메라는 집요하고 차갑다. 더 이상 어떠한 극적 굴곡도 기능하지 않는다. 그저 예고된 소멸을 견고하게 바라볼 뿐이다. 임권택은 이를 개입하지 않고 방관해두는 선택을 함으로써 죽음을 응시한다. 몹시도 서늘하고 차갑게.


오상무는 어디에도 갈 수 없을 것이며 어디에도 있을 수 없다. 죽음과 욕망이 떠나간 자리에 오상무는 텅 빈 기호로서 남아있다. 아마도 딸과 사위는 외국으로 돌아갈 것이며 보리는 아내의 부탁대로 안락사 처리되었다. 마지막 장면은 거리를 걷고 있는 오상무의 모습이다. 그는 어딘가로 갈 수 없다. 집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이며 텅 빈 몸의 걸음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그는 걷고 있지만, 갇혀 있는 상태이다. 오상무의 얼굴엔 죽음과 욕망에 대한 어떠한 두려움도, 불안도 소거되어 있다.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은 자의 사무적인 일상성이 주는 허무함과 불편함이 덮치는 순간, 영화는 끝난다.


추신. 꼭 언급하고 싶은 게 있다면 안성기 배우의 얼굴이다. 장례식장에서 오상무가 추은주의 몸을 훔쳐보고 웃고 있는 아내의 영정사진을 의식해서 눈치를 보는 장면 같은 경우, 안성기 배우의 얼굴과 표정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 외에도 안성기의 몸과 주름과 목소리가 아니었다면 성립되지 않았을 장면이 무수히 심어져있다. 말하자면 안성기라는 존재가 그 자체로 깊은 풍경이 새겨진 미장센처럼 보인다.


추신2. 임권택과 정성일 영화의 공통점. 춤 장면을 못 찍는다. 예쁜 배우를 데려다놓고도.


추신3. 김수철의 음악은 이번에도 별로다. <서편제>에 이어.

신고공유스크랩

추천인 2

  • golgo
    golgo
  • 파도
    파도

댓글 2

댓글 쓰기
추천+댓글을 달면 포인트가 더 올라갑니다
정치,종교 관련 언급 절대 금지입니다
상대방의 의견에 반박, 비아냥, 조롱 금지입니다
영화는 개인의 취향이니, 상대방의 취향을 존중하세요
자세한 익무 규칙은 여길 클릭하세요
1등
tioto 작성자

어벤져스 속편이 개봉함에 따라 <화장>의 산업적 시간은 거의 끝나가고 있지만, 놓치면 후회할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01:55
15.04.18.
profile image 2등

어벤져스 때문에 나머지 대부분의 영화들이 고전하겠더라고요.

좋은 글 잘 봤습니다.

23:49
15.04.19.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에디터 모드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하시겠습니까?

댓글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

공유

퍼머링크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HOT [범죄도시 4] 호불호 후기 모음 2 익스트림무비 익스트림무비 2일 전08:38 14054
HOT 일본영화 "작은사랑의 노래" 재미있네요!! 3 카스미팬S 1시간 전14:03 235
HOT 넷플릭스 '시티헌터' 로튼토마토 리뷰 1 golgo golgo 1시간 전13:46 520
HOT [불금호러] 환자를 골로 보내는 명의 - 닥터 기글 5 다크맨 다크맨 4시간 전10:37 696
HOT 해골이 티켓 배부, '악마와의 토크쇼' 시사회 3 golgo golgo 2시간 전13:05 579
HOT 범죄도시4 관객의 니즈를 충족시킬지 아는 영리한 영화 3 메카곰 2시간 전13:13 465
HOT 잘만들어진 수작급 B급병맛 음악영화"워크하드:듀이 콕... 2 방랑야인 방랑야인 4시간 전11:10 444
HOT <오펜하이머>를 보고 1 도삐 도삐 2시간 전13:01 308
HOT 야마다 나오코 감독 [너의 색] 장면 공개+코멘트 5 중복걸리려나 3시간 전12:08 487
HOT <데드풀과 울버린>의 쿠키 장면은 ‘너무 충격적’? 원... 4 카란 카란 3시간 전12:06 1624
HOT 마블 슈퍼 히어로 중 가장 오랜 경력 배우 2 시작 시작 3시간 전11:48 960
HOT 숫자로 알아보는 극장판 하이큐!! 쓰레기장의 결전 5 중복걸리려나 3시간 전11:23 287
HOT <엑스맨> 진 그레이 역 팜케 얀센, MCU 출연 가능성 암시 6 카란 카란 3시간 전11:22 1393
HOT <에이리언: 로물루스> 출연자, 제노모프가 정말 무서웠다 4 카란 카란 5시간 전09:50 1231
HOT 리들리 스캇 '글래디에이터 2' 베가스 테스트시사... 4 NeoSun NeoSun 6시간 전09:02 1403
HOT 레옹 영화 관람후 큰일날뻔 했네요. 9 RockFang RockFang 3시간 전11:21 1302
HOT 넷플릭스 '시티헌터' 엔딩곡 오리지널 버전과 비교 1 golgo golgo 4시간 전11:05 347
HOT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일본 블루레이 7월 ... 4 golgo golgo 4시간 전10:51 437
HOT 잭 스나이더가 슬로우 모션을 남발하는 이유 11 시작 시작 5시간 전10:13 1779
HOT 스즈키 료헤이의 스펙트럼에 놀란 어느 일본인 8 중복걸리려나 5시간 전09:59 971
1134143
image
호러블맨 호러블맨 1분 전15:15 8
1134142
image
호러블맨 호러블맨 6분 전15:10 67
1134141
image
NeoSun NeoSun 41분 전14:35 267
1134140
image
카스미팬S 1시간 전14:03 235
1134139
normal
뚠뚠는개미 1시간 전14:02 192
1134138
normal
대전imax 1시간 전13:57 352
1134137
image
NeoSun NeoSun 1시간 전13:54 270
1134136
image
NeoSun NeoSun 1시간 전13:53 290
1134135
image
NeoSun NeoSun 1시간 전13:50 212
1134134
image
golgo golgo 1시간 전13:46 520
1134133
image
슈퍼쏘니 1시간 전13:43 275
1134132
image
시작 시작 1시간 전13:23 222
1134131
normal
메카곰 2시간 전13:13 465
1134130
image
중복걸리려나 2시간 전13:12 170
1134129
image
golgo golgo 2시간 전13:05 579
1134128
image
도삐 도삐 2시간 전13:01 308
1134127
normal
토루크막토 2시간 전12:43 1150
1134126
image
golgo golgo 3시간 전12:16 460
1134125
image
중복걸리려나 3시간 전12:16 363
1134124
image
중복걸리려나 3시간 전12:08 487
1134123
image
호러블맨 호러블맨 3시간 전12:06 355
1134122
image
카란 카란 3시간 전12:06 1624
1134121
image
시작 시작 3시간 전12:01 368
1134120
image
NeoSun NeoSun 3시간 전11:51 407
1134119
image
시작 시작 3시간 전11:48 960
1134118
image
넷플마니아 넷플마니아 3시간 전11:43 222
1134117
image
중복걸리려나 3시간 전11:23 287
1134116
image
카란 카란 3시간 전11:22 1393
1134115
image
RockFang RockFang 3시간 전11:21 1302
1134114
image
중복걸리려나 3시간 전11:21 199
1134113
image
NeoSun NeoSun 4시간 전11:15 509
1134112
image
호러블맨 호러블맨 4시간 전11:14 186
1134111
image
방랑야인 방랑야인 4시간 전11:10 444
1134110
image
호러블맨 호러블맨 4시간 전11:06 327
1134109
normal
golgo golgo 4시간 전11:05 347